김용민 교수가 충남대 신문 칼럼에 쓴 글과 그의 블로그에 엮인글로 올라온 김우재님의 글입니다. 솔직히 두분은 어떤 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두분의 글에서 생각할점들이 많이 있는것 같네요. 20대르 향한 비판이건 20대를 위한 비판이건 지금의 20대가 가야할길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게 해주는 글이네요.
5월 30일. 서울광장이 ‘털렸다’. 검은 장정들이 어스름한 새벽, 잔디밭 안으로 밀고 들어와 장악한 것이다. 당일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집회’를 열기 위해 광장을 사수하려 했던 소수의 민간 활동가들은 전경의 완력(腕力)에 연행 또는 퇴거당하고 말았다. ‘노무현 추모 열기’로 재 점화될 줄 알았던 촛불은 그렇게 무력하게 꺼지고 말았다. 이명박 정부에 대해 분노하는 이들은 “80년대 대학생들이 2009년에 부활해 그 자리에 있었다면…”이라며 덧없는 통분(痛憤)만 쏟아냈다. 대학생이라. 2009년에도 선발됐고, 재학 중이고, 취업 될 때까지 졸업하려고 버티는 선배까지 합치면 학생들이 제법 있을 텐데, 왜 그들은 보이지 않는 것일까.
강단에서 학생들에게 물어 봤다. 바쁘단다. 맞는 얘기이다. 취업하려면 입학식 끝나기가 무섭게 어학 실력 향상, 학점 관리, 스펙 쌓기에 혈안이 돼야 한다. 이 빡빡한 스케줄 속에서 틈을 내 연애도 해야 한다. 어쨌든 아주 어렵게 이들에게 시간을 얻어낸다. 그리고 시국집회 참석을 권유한다. 그러면, “그거 합법 집회인가요? 네? 집회 허가가 안 났다고요? 불법 집회네? 불법 집회를 왜 하는데요?”라는 질문이 돌아온다. 눈물 어린 준법정신이다. ‘법질서’를 강조하는 이명박 대통령의 표창이 뒤따라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3·1, 4·19, 5·18, 6·10 중에 합법집회가 있었나?) 그렇게 해서 간신히 설득해 집회 장소로 데리고 나와도 이들의 ‘까칠함’은 꺾일 줄 모른다. “집회가 너무 선동적이네요. 정치적으로 세뇌시키려는 것 같아요.” 그래. 졌다. 네 팔뚝 굵다!
지금의 20대 초중반을 이루는 대학생 세대. 이들을 일컬어 ‘IMF 세대’라 부르는 이가 있다. 사실 일리 있다. 1980년대 중후반에 태어나 사춘기 무렵에 아버지의 실직 등 외환위기의 여파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감수성 예민한 그 때에 뼈저리게 했던 고민, 뭐였겠나. “우리 아버지는 왜 잘렸을까” 이거였을 것이다. 이 화두 앞에서 ‘처세’와 ‘생존’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이후 모든 사안을 ‘가치’보다는 ‘자신의 유불리’에 방점을 두고 사리판별을 하게 된다. 그리고 다수가 2007년 겨울, 투표장에서 밑도 끝도 없이 ‘경제를 살리겠다’고 설레발 떠는 후보에게 표를 헌납했다. 이 후보의 부도덕한 과거를 충분히 숙지했음에도 말이다. ‘참을 수 없는 가벼운’ 현실 인식에 있어 기성세대와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내 말을 들려주려 한다. 요컨대 “너희처럼 처신하면 밥되기 딱 좋다”라는 말이다. 자, 들어보라.
이명박은 너희에게 일말의 부채의식이 없다. “누가 찍으래?” 이런 입장일 것이다. 너희의 등록금 걱정, 취업 고민에 대해 공감이라도 해줄 것 같나. 천만에. 그러니 등록금 반값 공약을 일말의 거리낌 없이 부도냈다. 아, 이런 대안은 제시했더군. “열심히 공부해서 장학금 받으면 되겠네”라는. 또 너희의 미래? “4대강 살리기 할 테니 삽 하나 들고 와서 한 반 년 일하라”는 게 최선의, 또 전부인 해법이다. 참, 이것도 있군. “정규직인 아버지의 일자리를 없애줄 테니 대신 네가 인턴으로 들어와 커피 타오고 복사나 하라”고 하는.
386선배들이 있었다면 그래서 권력의 골칫거리가 됐다면,
과연 이명박이 지금과 같이 무덤덤한 태도를 보였을까.
누굴 탓하겠나. 너희가 만만하게 보여서이다. 앞서 얘기한대로 지금의 너희 자리에 1980년대 군부 독재 권력에 온 몸으로 항거했던 386선배들이 있었다면 그래서 권력의 골칫거리가 됐다면, 과연 이명박이 지금과 같이 무덤덤한 태도를 보였을까. 이명박은 강한 자에게 약하다. 아무리 수틀려도 미국에게 또 북한에게 찍소리 못하는 거 봐라. 봉하마을에서 험한 꼴 당할까봐 직전 대통령 빈소도 못 들르는 졸렬한 보신을 봐라. 촛불 또 일어날까봐 지나가는 다섯 살짜리의 촛불도 끄게 겁박하는 심약함을 봐라. 만약 천지가 개벽해 대학생들이 조직적인 봉기를 벌인다면, 이명박은 어떻게 나올까. 아마도 대학생 사회를 운동권과 비운동권 둘로 이간하기 위해 등록금 또 취업 정책에 상당한 성의를 나타낼 것이다. “강한 자가 (목표물을) 쟁취할 수 있다”는 원리, 연애에서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 너희에게 데모할 것을 부추기는 게 아니다. 도리어 만류하는 것이다. 왜냐면, 이미 너희는 뭘 해도 늦었기 때문이다. 너희의 단점, 즉 뒷모습을 이미 이명박이 목격했기에 어설픈 저항했다가는 더 가혹한 보복만 당할 것이다. 그냥 조용히 공부하고, 졸업해서, 삽 들고 안전한 삶의 길을 모색해 나가길 바랄 뿐이다. 이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또 너희가 소화하기 좋은 유일한 충고이다. 다만, 나는 지금 10대에게 큰 기대를 건다. 이 친구들은 촛불의 발화점이 됐던 소위 촛불 소년 소녀 세대이다.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점에 대해 적극적으로 토론하는 애들이다. 독재 권력은 물론,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구조적 불평등 현상에 대해 강렬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이 아이들이 대학에 들어올 내년 또는 내후년쯤이면 아마 우리 대학 사회도 생존의 쟁투장이 아니라 가치와 사상이 꽃피는 진정한 지성의 전당이 될 거라 믿는다. 그리고 이 아이들이 졸업하면 너희 세대를 앞지를 것이고, 곧 우리 사회의 중심이 될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이 아이들에게 판 돈 모두를 걸련다. 너희에게 너무 야박하게 들렸을 법한 이야기였나?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너희는 안 된다. 뭘 해도 늦었기 때문이다.
김용민씨의 훈계에 어느 정도의 진정성이 녹아 있는지는 모르겠다. 오래전 홍세화가 '그대 이름은 무식한 대학생'이라며 대학생들의 무식함을 훈계했을 때조차, "너희는 안된다. 뭘해도 늦었기 때문이다"라는 비관적 태도를 보여주지는 않았다. 홍세화는 대학생들이 무식해진 연유를 '국가에 의한 제도교육'과 '자본에 의한 대중매체'라는 구조적인 문제에서 찾았다. 홍세화는 탄식했을지언정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로 반짝 뜬 김용민은 홍세화씨의 태도에서 한발 더 나아갔다. 20대에겐 아예 희망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그들이 타이밍을 놓쳤기 때문이다.
얼치기 진보의 얼치기 분석과 해결책
세대론의 유행은 오래되었다. '전후세대'라는 표현부터 '386'과 'X세대론'을 거쳐 이제는 '88만원 세대'와 '실크세대'까지, 지식인들의 세대론은 단 한번도 생산적인 담론을 쏟아낸 적 없는 유행가에 불과했다. 먹고 살기 위해 자신이 속한 세대의 입지를 강화시키고, 다른 세대를 욕하며, 물리적/사회적/문화적으로 동질화될 수 없는 세대론을 들고 나오는 문제는 지적불성실과 담론의 건강성 측면에서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설사 그 담론의 효용성이 담보되더라도 심각한 고민이 필요한 문제다.
세대를 분석하는 일 자체에 대해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세대론이 한 세대에 대한 가치평가로 흐를 때다. 세대에 대한 분석은 필연적으로 가치평가를 수반할 것이고, 다양한 평가들은 세대에 대한 비난과 칭찬으로 이어진다. 이미 진보가 대중을 바라보는 방법에 대한 글에서 말했듯이, 사회적 현상에 대한 원인을 개인에서 찾으려는 성향은 진보의 것이 아니다. 홍세화는 대학생에 대해 실망했지만, 그 원인을 대학생들의 의식에서 찾지 않았다. 문제의 원인은 사회구조에 있었고, 그 해결책도 사회구조의 개혁에 있었다.
반면, 김용민은 너무 쉽게 20대들을 비판한다. 386과 자신이 속한 소위 298세대의 위업을 장황하게 설명하던 김용민은, 촛불을 들고 나온 10대들을 가르키며 20대에게 부끄럽지도 않느냐는 윤리적 도발을 시도한다. 얼핏 가능해보이는 얘기다.
문제는 김용민의 도발로 흥분한 20대들의 분노게이지가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아니라 엉뚱하게 김용민 본인에게 향한다는 데 있다. 이건 순수한 전략적 차원의 문제다. 진보가 사회적 문제의 원인을 구조에서 찾고 해결책도 구조에서 찾아야 한다는 점에 동의한다면, 김용민은 두 가지 모두에서 실패했다. 그는 문제의 원인을 20대라는 세대에서 찾았고, 그 해결책도 20대를 원망하는 것에서 구했다. 따라서 나는 김용민에게서 그 어떤 진지한 고민의 흔적을 찾지 못하겠다. 아니 실은 20대들의 분노에 동참하겠다. 마음껏 김용민을 욕하자. 그는 얼치기 진보다. 시국강연이랍시고 대학생들 앞에서 자신의 홍보에 여념이 없는 그의 모습은 진보의 탈을 쓴 변희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사회의 구조적 모순의 원흉이 뚜렷하지 않은 지금, 이명박을 선택한 이들과 그를 퇴출하고 싶은 대중의 스펙트럼이 모호하게 겹치는 현재의 상황은 그 적이 외부에 있었던 일제시대와도, 적의 모습이 너무나도 뚜렷했던 독재정권 시절과도 다른 것이다. 20대들의 방황과 고민은 거기에 있다. 김용민은 그런 분석에는 관심이 없다. 그에겐 민주화시절의 386처럼 거리로 뛰쳐나가지 않는 20대들이 겹쳐보일 뿐이다. 참으로 저급한 분석이다.
만해와 크로포트킨의 <청년에게 고함>
민족의 운명이 위협받던 일제시대에도 청년의 행동에 대한 문제의식은 존재했다. 만세운동이 있었고, 만주에서의 항일투쟁이 있었지만 모든 청년들이 그 대열에 동참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만해는 <조선 청년에게 고함>을 썼다. 만해는 말한다. 현재의 역경은 불운이 아니라 행운이라고. 조선의 청년들은 불운아가 아니라 행운아라고. 만해는 이론가들의 어려운 이야기 따위 집어치우자면서 쉽게 말해준다. 조선청년은 자애(自愛)하라고. 스스로를 사랑하라는 말이 시대를 고민한 만해가 청년들에게 해줄 수 있는 충고였다. 만해가 김용민보다 국가의 안위를 고민하지 않은 인물이었을까. 만해가 행동하지 않는 청년들을 향해 '너희는 이미 실패했다'라고 말했다면 우리가 만해에게 공감할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만해는 스스로 걷는 것으로 청년들에게 보여주었다. 훌륭한 교사는 학생들에게 훈계를 일삼지 않는다. 다만 보여줄 뿐이다. 나는 김용민의 어떤 행적이 20대들에게 귀감이 되는지 잘 모르겠다. 촛불항쟁에 참여했다는 것이?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독설을 퍼부었다는 것이? 만해가 이론가들의 말을 빌어 청년을 훈계하지 않은 이유는, 스스로 옳은 길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택은 청년들이 하면 된다. 교사는 교사의 행동에서 학생의 공감을 이끌어 내는 것으로 충분하다. 만해는 그리 했다.
진지한 젊은이, 남녀, 농부, 노동자와 군인, 여러분 모두가 여러분의 권리를 생각하고 우리에게로 올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형제와 함께 혁명을 준비하기 위해 우리에게 올 것이고, 그 혁명은 모든 노예제도를 폐지하며, 모든 구속을 끊어버리고, 옛 전통을 깨뜨리며 모든 인류에게 새로운 희망의 지평선을 열어줄 것이다. 그리하여 그 혁명은 마침내 인류사회에서 진정한 평등과 진정한 자유를 마침내 성취하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을 위해 일하라. 그들 노동의 열매를 마음껏 즐기기 위해, 그들 능력의 완전한 발전을 위해, 또 이성적이고 인간적인 행복한 삶을 위해 일하라. 우리가 목표로 하는 유익한 것을 성취하기에는 우리 집단이 너무 연약하다고 말하게 하지 말라...고통받으며 분노하는 우리 모두가 대중인 것이다. 우리가 바로 모든 것을 삼킬 수 있는 바다(대양)인 것이다. 우리가 뜻만 가진다면, 정의의 순간이 오고야 말 것이다.
<청년에게 호소함>: 아나키즘도서편찬위원회
크로포트킨과 같은 급진적 아나키스트조차 김용민처럼 청년을 조롱하고 비난하는 쉬운 방법을 택하지는 않는다. 그는 청년들에게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보여주고, 이를 해결할 방법을 만든 후에야 이들에게 혁명에 동참하자고 제안한다. 그는 과학자로, 의사로 살고 있는 청년들을 힐난하지 않았다. 다만 그들에게 현실을 보여주고 설득했을 뿐이다. 김용민은 현실을 보여주는 데에도 실패했고, 설득에는 완전히 실패했다.